국민 누구나 좋아하는 메뉴 돈가스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메뉴가 돈가스 아닐까 하는데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가스 드시는 분들 보면 아저씨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물론 저도 그중의 하나이구요. 저는 생전 처음으로 돈가스를 맛보았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갖고 있는데요. 옆집 친구의 아버님께서 당시 관광버스 운전기사셨는데, 초등학교 3~4학년때 그 친구하고 저하고 둘을 강원도 속초 어딘가로 가는 관광길에 같이 묻어서 태워주셨던 적이 있어요. 그때 강원도 가는 국도 어딘가에 있는 휴게소에서 난생처음으로 돈가스를 먹어보게 되었습니다. 당시가 70년대였으니, 돈가스는 경양식집이라는 데서나 팔던 평소에는 절대 먹어볼 수 없는 그런 음식이었죠. 그때까지 경양식집 문턱에도 가본적이 없는 놈이 처음으로 나이프도 잡아보고 어색한 칼질로 먹어본 돈가스의 맛은 환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지금의 아저씨들이 어린시절 처음 맛본 돈가스의 환상적인 기억을 잊지 못해서, 어디가서 메뉴에 돈가스가 보이면 무조건적으로 돈가스를 시켜 드시나 봅니다.
사설이 길었구요. 오늘은 북한산 가는길에 있는 홍익돈가스와 배달시켜먹어도 맛있는 역촌 성북동왕의돈가스 집 이야기입니다.
먼저 북한산 가는길에 있는 홍익돈가스, 프랜차이즈 입니다. 돈가스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이름을 홍익으로 하였다는데, 2010년에 동탄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꽤 많은 곳에서 보이는 집입니다. 돈가스야 왠만해선 맛없기도 힘든 음식이지만, 이 집은 좋은 기름을 자주 갈아준다는 하는군요, 이게 튀김요리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텐데, 그래서 인지 한입 베어물었을때 신선하다는 느낌이 확실이 있습니다. 특히나 저는 생선가스가 아주 괜찮았습니다. 튀긴 기름도 신선한데다가 냉동생선을 쓰는게 아닌것 같습니다. 두툼하니 신선한 생선살이 아주 좋구요 생선맛이 진하게 나는 생선가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돈가스는 두툼한 일본식 보다는 바삭하고 얇은 옛날식 왕돈가스를 더 선호하는데요. 이 집 왕돈가스 양도 엄청납니다. 성인남자도 남기겠어요. 그렇게 달지 않고 진한 소스에 좋은 고기 그리고 신선한 기름 삼위일체네요. 모짜렐라 듬뿍들어간 치즈롤가스도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일요일 느즈막히 일어나 다 귀찮을때, 살짝 도심에서 벗어나 경치 좋고 공기 좋은데서 든든하게 돈가스로 아점 아주 좋은데요.
이번엔 배달시켜먹어도 맛있는 역촌 성북동왕의돈가스입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밥하기 귀찮고 대충 때우고 싶을때 중국음식은 싫고 만만한게 돈가스죠. 이 집은 가서 먹은적은 없는데 우연히 배달로 시켜먹어보고는 괜찮아서 자주 이용하는 집입니다. 튀긴음식인데도 불구하고 배달로 먹어도 맛있으니, 직접 매장에 가서 먹으면 더 괜찮을테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저희 세식구는 주로 정식(돈가스+생선가스+함박)과 왕돈가스+비빔냉면세트 이렇게 주문합니다. 세식구 먹기 딱 좋아요. 세트로 딸려오는 비빔냉면도 사이드메뉴 치고는 나쁘지 않아서 살짝 느끼할때 비빔냉면 한젓가락씩하면 좋습니다. 이 집도 역시 생선가스 신선하고 두툼하니 좋습니다. 이제 돈가스 맛집의 기준은 생선가스로 해야 할까 봐요. 생선가스를 잘해야 돈가스도 잘한다 뭐 이런 기준, 괜찮은거 같습니다. 함박스테이크도 나쁘지 않구요. 상호에는 성북동이 들어가는데 성북동에 있는 돈가스 집들하고는 관련이 없는듯 합니다
백욱인 교수라는 분인 쓴 돈가스 이야기인데 아주 재밌습니다.
번안물로 본 사회와 문화
음식의 번안
돈가스의 번안과 경양식
돈가스의 계보
우리가 즐겨 먹는 돈가스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슈니첼, 영국·미국의 커틀릿, 일본의 가쓰레쓰로 이어지는 계보의 끝자리를 차지한다. 얇게 썬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부치듯 튀기는 서양식 슈니첼이나 커틀릿이 메이지 시기 일본이 육식을 허용한 뒤 60여 년에 걸친 번안과 변형을 통해 돈가스라는 요리로 자리 잡았다. 슈니첼이 고운 빵가루를 묻혀 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치는 방식이었다면 일본 돈가스는 두꺼운 돼지고기에 고운 빵가루 대신 굵은 빵가루를 묻혀 많은 양의 기름에 튀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일본식 식사에 알맞게 먹는 방식을 바꿨다. 칼로 썰어 먹는 서양식 식사법 대신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도록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또 밥이나 된장국과 먹을 수 있도록 배열하고, 영국의 우스터소스를 변형한 일본식 소스를 곁들였다.1) 재료와 요리법과 먹는 방식에서 새로운 선택과 배열을 통해 서양 요리를 일본식으로 번안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원과 출처도 모른 채 즐겨 먹던 요리들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중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대표적 화양절충 요리가 한국에 전달되어 변화되는 과정과 의미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黃橋益)은 돈가스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어느 날 일본에서 일본식 돈까스를 먹으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돈까스, 돼지고기 튀김이잖아. 튀김! 일본어로는 덴뿌라. 그래, 일본인은 덴뿌라를 무척 좋아하지.’ 그 시각에 따라 나는 속으로 돈까스를 ‘돼지고기 덴뿌라’로 고쳐 불러 보았다. 그러니 돈까스 식당의 메뉴가 다시 보였다. 생선까스와 새우까스가 기본으로 있고 비프까스를 내는 데도 있다. 튀김 전문점이라 할 수 있다.2)
이런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고, 간단하지만 분명한 이런 인식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우리는 돈가스의 정체를 잘 몰랐다. 서양의 음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으로 번안된 뒤 식민지로 이전된다. 식민지에서는 그것을 대표적인 서양 음식으로 받아들인다. 식민지 사람들은 일본의 번안 과정을 상세히 알지 못했고, 서양 음식 전문가는커녕 서양 음식을 직접 접해 본 사람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양절충 요리의 탄생
19세기 중반만 해도 일본에서는 육식이 금지되었다. 1871년 12월에야 육식 금지가 풀린다. 이듬해 1월에는 메이지 천황이 쇠고기를 시식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지향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하며 막부 말기부터 서양 문명을 일본에 적극 소개했다. 그는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 번에 걸친 서구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 의식주(西洋衣食住)>라는 실용서도 출판했다. 그리고 문명개화라는 면에서 고기 중심의 서구 음식 문화를 옹호했다. 그는 쇠고기와 우유를 권하면서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영양과 건강을 강조했다. 서양인에 비해 왜소하던 일본인의 건강 증진에 새로운 음식 문화가 꼭 필요하다고 여긴 메이지 정부는 서양식 요리를 도입해 국민 체위를 향상하고, 군대와 학교 등에 단체 급식을 도모해 음식 문화 개선을 추진했다.
문화 간 상호작용에 따른 문화접변은 피할 수 없다. 침투와 영향의 방향성도 일정 기간 동안은 거스르기 힘들다. 동서 문화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고 기울어져 있었다. 적극적인 흡수냐, 소극적인 수용이냐에 따라 번안의 주체성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번안 문화의 힘과 성격도 달라진다. 문화 수용 주체의 계급성도 중요한 변수다. 지배 문화와 하위문화는 번안의 방식과 틀도 달리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외국 문화의 수입과 수용에는 상류층이나 지식층이 나선다. 그러나 그것을 변용시키고 전유하며 번안하는 주체가 반드시 최초의 수입 주체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 요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들만의 ‘양식(洋食)’을 만들었다. 1910년 무렵 서양 요리와 일본 요리의 적절한 조합을 통해 화양절충 요리가 완성된다. 천황을 비롯한 관료와 지식인들의 서양 요리 예찬과 보급이 대중에게도 전달되어 번안 요리를 만들어 낸다.
일본이 번안한 서양 음식
식민지 시대의 양식은 서양 요리가 아니라 일본이 번안한 화양절충 요리였다. 1930년대 후반 ‘동아일보’ 가정란에 돈가스 만드는 법이 실렸다. 당시 일본에서 대중화된 돈가스가 식민지에도 이식되어 가정 요리로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양식당에서는 일본식으로 번안된 요리들이 주요 메뉴로 팔리고 있었다.
대중잡지 <별건곤> 1930년 7월호는 ‘신사전’이라는 지면에 ‘코록케(Croquette), 잘게 썰은 肉. 감자(馬鈴薯) 가튼 것을 동그랏게 만들어서 지저 낸 西洋料理의 일흠’이라는 설명을 실었다. 일본식 발음인 고로케가 익숙한 크로켓은 돈가스처럼 일본식으로 번안된 대표적 튀김 요리다. 앞의 기사를 통해 1930년대에 일본식 양식이 조선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별건곤> 1932년 11월호에 실린 만화는 백화점을 견학하는 학생이 음식점 진열장 앞에서 군침을 삼키며 가쓰레쓰, 야사이사라다, 라이스카레 등 서양 음식의 일본식 이름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당시 양식당에서는 돈가스와 카레라이스 등이 팔리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일본이 번안한 양식과 미국에서 직접 유입된 양식 등 두 가지 양식이 해방 이후 공존했다. 식민지 36년의 경험 때문에 일본식 양식이 더 친근하기도 했는데, 때로는 식민지 근대의 산물이 근대와 반대되는 전통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사라져 가는 옛것을 무조건 전통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센베이’, ‘오꼬시’처럼 이름만으로도 근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을 한국의 ‘전통’ 과자로 아는 사람이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해방 후 한국의 경양식
해방이 된 뒤에도 일본식 양식당의 메뉴는 양식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한국에서 전통을 이어 갔다. 돈가스는 정체가 애매한 상태로 1960년대 경양식집 메뉴를 장식했다. 흥미로운 점은 ‘경양식’이라는 말에 있다. ‘전채-주요리-후식’으로 이어지는 서양 음식과 달리 ‘가벼운 양식’이라는 뜻의 경양식이라는 말이 출현한 때는 아마도 ‘함박스테이크’, ‘오므라이스’, ‘돈가스’, ‘하이라이스’ 같은 기본 메뉴가 서양 요리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챈 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화는 사람을 따라 다른 나라에 전달되고, 그곳에서 다시 변형된다. 직접 서양 땅에서 서양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본이 번안한 양식은 그냥 서양 음식을 대표하게 되어 버렸다.
1960년대 초반 신문에서 경양식이라는 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작 일본에서는 경양식이란 말이 잘 쓰이지 않은 듯하다. 1950~1980년대에는 일본식 양식을 파는 한국식 음식점이 경양식집이었다. 경양식집의 일품요리는 돈가스를 비롯한 일본식 양식 요리였다. 음식을 주문하면 “빵으로 할까요, 밥으로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명색이 양식집인데 ‘다꾸앙’을 요리에 곁들였다.
나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 어쩌다 경양식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처음 맛보고 그것이 양식의 정석인 줄 알았다. 중학교 시절인 1970년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패를 지어 세운상가 분식집에서 우동이나 토스트를 사 먹으면서 거들먹거렸다.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경양식집에서 미팅을 할 때 가끔 돈가스를 시켜 먹었다. 음식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식점은 술과 여자를 끼고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경양식집이 술을 파는 살롱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아침에 커피, 점심에 경양식, 야간에 술을 파는 식으로 하루 세 번 변신했다. 그런 과정에서 경양식집은 돈이 되는 술집인 살롱으로 점차 변해 갔고, 살롱에서는 호스티스나 여급이 술 시중을 들었다.3) 그러면서 경양식집은, 유흥 문화의 중심이던 1930년대 카페의 1960년대판이 되어 버렸다.
돌고 도는 돈가스에 대처하는 법
일본식으로 절충한 서양 요리였던 돈가스가 지금은 완전히 일본 요리가 되었다. 한국의 돈가스 전문 식당에서 ‘원조 일본 돈가스’를 내세우기도 하니 돈가스가 일본식 번안 요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1980년대부터 일본 돈가스가 전통 돈가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수입되어, 1983년에 일본식 돈가스를 파는 ‘명동돈가스’가 문을 열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돈가스 체인점이 갑자기 많이 생겼다. “핑키핑키 배달 전문 돈까스 전문점, 전혀 새로운 차원의 델리 돈까스 전문점”(1993년 9월 24일 자 ‘경향신문’ 광고), “하루 평균 90만 원 매출 거뜬 코바코 돈까스”(1999년 7월 13일 자 ‘매일경제’ 광고), “불황 속에서도 재미 좋은 분들. 돈까스 전문점 굿 후랜드”(1993년 7월 6일 자 ‘동아일보’ 광고), “베이브힐 돈까스 전문점. 돈(豚)이 돈 되네!”(1996년 9월 16일 자 ‘경향신문’ 광고). 이렇게 당시 업체들은 배달 서비스를 추가하거나, 돈가스 전문으로 특화하거나, 메뉴를 확장했다. 특정 직종을 주요 고객층으로 삼은 기사식당 돈가스집도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분식집의 한식 반찬과 결합하면서 싸고 푸짐한 서민 음식으로 번안되기도 했고, 즉석식품인 냉동 돈가스도 출시되었다.
우리에게 돈가스는 그 정체가 아주 헷갈리는 요리였다. 1972년에는 서울시가 관내 요식업소에 메뉴 중 돈가스를 ‘포크 스틱’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업체 스스로 안 바꾸면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4) 그런데 이미 경양식집 돈가스는 슈니첼도, 커틀릿도, 가쓰레쓰도 아닌 돈가스였다. 경양식집에서 팔던 돈가스를 이제 ‘옛날 돈가스’라고 부른다. 1930년대 일본의 근대를 상징하던 대표적인 화양절충 요리, 돈가스가 전통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일상생활의 식민지 유물이 전통으로 둔갑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가? 음식의 배경과 형태를 연결하는 지식이 부족했고, 맥락에 맞는 모양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가스라는 일본식 번안 음식이 수십 년간 양식의 근간으로 경양식집 메뉴를 차지하는 것이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한 한국식 양식의 수준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돈가스의 근원을 확인하고, 돈가스 변형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 배경과 적당한 모양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현대의 돈가스에 맞는 대처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음식의 번안 - 돈가스의 번안과 경양식 (번안물로 본 사회와 문화)
저자 백욱인 교수
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해 온 연구자로서 한국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아이템 ‘번안물’을 통해 한국 근대를 꿰뚫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은 책으로 《인터넷 빨간책》,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 《한국사회운동론》, 《정보자본주의》, 《디지털 데이터·정보·지식》, 《컴퓨터의 역사》, 《속물과 잉여》(편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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